선 이야기

한 글자가 어긋나 오백 생을 여우로: 백장 야화 공안

백장의 산에 수백 년을 법문을 들으러 오던 노인이 있었다. 옛 주지였는데, 하나의 물음에 한 글자를 잘못 답해 오백 생 야호의 몸에 떨어졌다고 한다. 백장은 단 한 글자를 고쳐 주었고, 여우는 그 자리에서 몸을 벗었다. 그 한 글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틀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면제받으려 하고, 하나는 그저 깨어 있다.

一一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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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안#백장#야호#인과#무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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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가 어긋나 오백 생을 여우로: 백장 야화 공안

며칠 전 《무문관》을 다시 읽다가 두 번째 칙거, "백장야호(百丈野狐)"에 닿았습니다. 다 읽고 나서 의자에 앉은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습니다.

우연인지, 얼마 전에 백장 선사에 관해 쓴 적이 있습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아흔 살에도 밭에 나가던 노승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농사 이야기보다 더 기이하고,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백장 선사가 산에서 법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중 속에는 늘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다들과 함께 와서 듣고, 끝나면 돌아가는 노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모두 흩어진 뒤에도 그 노인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장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적 가섭불의 시대에 이 산에 살면서,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때 한 수행승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저는 답했습니다. 떨어지지 않는다, 고.

그 대답 하나 때문에 저는 야호(野狐)의 몸으로 떨어졌습니다. 오백 생. 오백 번의 삶 동안 내내 여우였습니다. 노인은 말했습니다. 오늘 그 물음에 대신 답해 주시기를 청하러 왔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백장은 노인을 바라보며 넉 자를 말했습니다. 불매인과(不昧因果). 인과에 어둡지 않다.

그 한마디에 노인은 크게 깨쳤습니다. 예를 올리고 말했습니다. 이제 야호의 몸을 벗었습니다. 뒷산 굴에 여우의 시체가 있으니, 돌아가신 스님의 예로 불살라 주십시오.

이튿날 백장은 정말로 대중 전부를 데리고 뒷산에 올라, 지팡이로 굴에서 여우의 시체를 끄어내어, 망승(亡僧)의 의례대로 다비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얼이 빠졌습니다. "불락(不落)"과 "불매(不昧)", 한 글자 차이. 한 글자에 오백 년. 너무 비싼 글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첫 느낌은 그 노인이 억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가 그렇게 틀리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인과를 넘어서는 것 아닌가. 불경도 해탈을 말합니다. 수백 년 주지를 지낸 사람이 글자 하나를 잘못 답해 오백 생을 여우로 산다니, 벌이 너무 무겁지 않은가.

이 의문을 이틀쯤 놓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할수록 이 이야기는 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 틀렸을 수도 있지만 — 이렇습니다.

"불락인과"는 면제권입니다. 그 이면에 적힌 말은 이것입니다. 나는 여기까지 수행했으니, 인과는 이제 나에게 미치지 않는다. 쌓은 선, 지킨 계, 앉은 참선 — 그만큼 저축했다. 이제 나쁜 결과가 와도 "이건 해당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저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제가 늘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알아차립니다. 몇 년씩 경을 읽었는데 왜 아직 불안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왜 집에 시련이 오는가. 삼 년을 앉았는데 왜 아직 잠 못 이루고, 사소한 일로 다투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에서 권 한 장을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했으니 좋은 일이 있어야 하고, 나쁜 일은 나를 피해 가야 한다고.

권을 꺼내 들어도 세상은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러워지고, 의심하게 되고, "수행은 소용없다"가 됩니다.

그 노인도, 수백 년 주지였다면, 아마 같았을 것입니다. "불락인과"라고 답할 때 학승을 속이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믿었을 것입니다. 수행자는 "초월"에 대해 조용한 상상을 품기 쉽습니다. 인과를 넘고, 무상을 넘고, 생로병사를 넘는. 그 상상은 잘 숨습니다. 정진과 꼭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불매인과"는 어떻습니까. "매(昧)"는 어둡다, 가리다,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매는, 똑똑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똑똑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 그 단숔한 사실이 명명백백합니다. 내 생각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 행위 하나하나가 인과 안에 있고,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숨지 않습니다. 비를 맞으며 걷는, 깨어 있는 사람처럼. 젖을 것을 알기에, 이 구간을 제대로 걷는 것입니다. 비가 없는 척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집을 나서지 않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 두 글자를 오래 굴리다가, 차이는 학문의 차이가 아니라 노인의 — 그리고 제 —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바람에 있다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불락인과" 뒤에는 이런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수행은 빚 갚으러 하는 것이다, 라는.

"불매인과"는 그 바람을 내려놓습니다. 수행은 똑똑히 보기 위한 것이다, 라고.

하나는 면제받으려 하고, 하나는 그저 깨어 있습니다.

면제받으려 하는 길은 걸을수록 두려워집니다. 언젠가 다 갚을 수 없는 것이 오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길은 도리어 넓어집니다. 갚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매인과" 넉 자 아래에서 노인은 깨치고, 여우의 몸은 그 자리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한마디에 대오"가 과장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마디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백장이 사면해 준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스스로 본 것입니다. 오백 생의 여우 몸을 가두고 있던 것은 인과가 아니라, "나는 인과 바깥에 있을 수 있다"는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 내려놓아진 순간, 자물쇠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대목 — 이튿날 백장은 온 절 대중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 굴에서 여우의 시신을 끄어내어, 망승의 예로 다비했습니다.

여우에게, 스님의 장례를 치러 준 것입니다.

그 장면에는 아무 교리도 없지만,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 닿습니다. 선(禪)이 대단한 것이 여기 있습니다. "이 여우는 업보의 보임이니 다들 경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우리의 선배였다. 오백 년을 도를 구했다. 떠날 때는 누군가 보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 며칠 그 노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그가 "늘 법문을 들으러 왔다"고 말합니다. 즉, 오백 생의 여우 삶 속에서도 해마다 백장의 법문을 들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여우가, 사람의 강의를 청강하고, 수백 년을. 용서받으러 온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한 글자를 기다리러 온 것입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손목의 염주를 만졌습니다. 우리도 각자 면제권을 한 장씩 품고 있나 봅니다. 오래 지켜온 채식, 계속해 온 운동, 쌓은 선행, 경전 필사. 그 모두가 나쁜 게 아닙니다. 다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 아래 숨어 있는 바람만은, 한 번 똑똑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습니다. 똑똑히 보았다고 선행을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거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밖에는 비가 옵니다. 세차지는 않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준 당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 당신의 "면제권"은 무엇입니까. — "이렇게 해 왔으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그 문장은.

둘, 수행도 선행도 빚 갚기가 되지 않는다면, 그래도 계속하시겠습니까.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셋, "비 속을, 깨어서 걷기". 당신의 삶에서, 비가 오지 않는 척하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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