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모두 같은 타로 카드. 나는 동전 세 닢을 떠올렸다
친구가 그만둬야 하는지 타로에 세 번 물었고, 세 번 모두 같은 카드가 나왔다. 나는 어릴 때 본 또 다른 '답을 주는 기계' — 동전 세 닢과 삼천 년 전 책 한 권 — 을 떠올렸다. 융은 이것을 공시성이라 불렀다. 동전은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작은 고요 한 조각을 건네줄 뿐이다.

어제 밤, 친구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왔다. 어두운 벨벳 위에 놓인 타로 카드 한 장. 그 위에는 거꾸로 매달린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친구가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야? 그만둬야 할까?
세 번 뽑았는데, 세 번 모두 같은 카드가 나왔다는 거였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어릴 때 본 또 다른 '답을 주는 기계'를 떠올렸다. 동전 세 닢, 여섯 번 흔들기, 한 노인, 모서리가 닳은 책 한 권.
두 개의 기계, 하나의 질문
타로는 사실 잘 모른다. 그래도 대충은 안다. 일흔여덟 장의 카드, 정방향과 역방향, 한 장 뽑아서 읽는다. 묻는 사람은 마음속의 안개를 건네고, 카드는 하나의 이미지를 건네준다.
주역은, 엄밀히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점술 책도 아니다. 더 오래된 무언가다. 육십사 개의 괘, 각 괘에 여섯 개의 효, 음과 양이 마치 코드처럼 배열되어 있다. 삼천 년 전 사람들은 사람이 빠질 수 있는 모든 처지를 하나하나 세어 보았고, 육십사 가지로 정리했다. 이제 막 시작된 "잠룡물용"(용은 잠겨 있으니 움직이지 말라), 발밑이 위태로워지는 "이상견빙지"(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온다를 알라), 지나친 끝의 "항룡유회"(지나치게 높이 난 용에는 후회가 따른다).
한쪽은 그림이 그려진 일흔여덟 장의 카드. 한쪽은 삼천 년 전의 육십사 개의 기호. 대륙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도 모르는 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속에서 말로 잘 되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바꾸는 일.
가장 어려운 건 결코 답이 없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답이 뿌옇게 흐려져서, 자기 자신조차 그걸 못 보는 것이다.
동전이 떨어지는 일 초
어릴 때 고향에서 점을 치는 걸 본 적이 있다.
TV에서 나오는 그런 신비로운 장면이 아니었다. 그냥 아주 평범한 오후, 문가에 앉은 노인이 손안에서 동전 세 닢을 덜그럭거리다가 책상 위에 떨어뜨린다. 앞면 뒷면을 한 번 훑고, 한 획 적는다. 여섯 번, 여섯 획, 그리고 책을 펼친다.
전부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때는 나도 이걸 믿지 않았다. 신기했던 건 옆에서 묻던 사람이었다. 동전이 떨어질 때마다 그 사람 얼굴이 움직였다. 앞면 세 개면 어깨가 툭 내려가고, 뒷면 둘에 앞면 하나면 미간이 좁아졌다.
훨씬 나중에 조금씩 알게 되었다. 동전 자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전이 떨어진 일 초, 묻는 사람 가슴 깊은 곳에서 '덜컥' 하고 움직인 그것만은 진짜였다.
심리학에서는 지금 이것을 직관이라고 부른다. 그만둬야 하는지 아닌지 —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이 마음 아주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어서, 평범한 날에는 손이 닿지 않는다. 무언가가 그것을 건져 올려줄 필요가 있다. 카드 한 장, 괘 하나, 혹은 허공에 던진 동전 하나. 그것이 떨어지는 순간, 가슴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이 대개 답이다.
그다음의 해석이란 건, 그 생각에게 말을 찾아주는 작업일 뿐이다. 당신이 마침내 그것을 인정할 수 있도록.
스위스 사람이 삼천 년 전 책에 서문을 쓴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 내가 줄곧 신기하게 여기는 대목이 있다.
1920년대, 빌헬름이라는 독일 사람이 주역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가 죽은 뒤 이 책은 한 스위스 심리학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융이다.
프로이드와 나란히 불리는, 그 융 말이다.
그는 이 중국의 오래된 책을 진지하게 연구했고, 영어판을 위해 긴 서문을 썼다. 서문에서 그는 말했다. 서양인은 '왜'라고 묻고, 언제나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주역은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알려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어느 괘에 있는지를. 날씨를 보는 것과 같다. 비가 오면, 우산을 챙기면 된다.
융은 그것을 위해 말까지 만들었다. '싱크로니시티(共時性)'. 이 세상에는 인과관계로 이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일어나고 서로 응답하는 일들이 있다는 뜻이다. 마음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으면, 동전이 우연히 그렇게 떨어진다. 동전이 뭔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그 한순간, 안쪽의 세계와 바깥의 세계가 같은 문장을 말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과학의 언어로 말하던 심리학자가, 점술의 오래된 책을 진지하게 대했다. 신통해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자신이 반평생 찾던 것 — 사람의 마음이 세계와 어떻게 서로 응하는가 — 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우리가 미신이라고 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는 주워서 학문으로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점치는 것은, 미래가 아니다
그래도 주역을 너무 신비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동전을 여섯 번 던져 괘를 얻고, 그다음은? 주역은 거의 '어떻게 될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 여기 있고, 다음은 대개 이렇게 되고, 이렇게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할 뿐이다.
건괘의 가장 위 효는 '항룡유회'라고 한다. 너무 높이 난 용에게는 후회가 남는다. 예언이 아니다. 주의다. 겸괘는 여섯 효가 모두 길하지만, 겸손한 사람에게 좋은 보답이 온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낮게 두는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육십사 괘에는 더 무서운 층위가 하나 있다. 좋은 괘는 영원히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괘도 영원히 나쁜 것이 아니다. 태는 극에 이르면 비로 돌아가고, 박은 바닥을 치면 복으로 돌아온다. 좋은 것은 지나치면 나빠지고, 나쁜 것은 바닥까지 가면 다시 돌아온다. 변화만을 유일한 불변으로 삼아, 그것을 책 제목에 새겼다. 역(易), 곧 변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주역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다. 삼천 년 전 중국 사람들이 '변화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남긴, 하나의 완전한 노트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 — 타로로든, 동전으로든, 온갖 방법으로든 — 가 가져가는 질문은 같은 것이다. 그만둬야 하나, 헤어져야 하나, 이사해야 하나. 옛 점 사례들을 보라. 묻는 건 결국 이런 것들이다. 이 병은 걱정인가, 이 장사는 될 것 같은가, 떠나야 하나 남아야 하나.
세상은 바뀌어도, 사람이 묻는 건 그 몇 가지뿐이다.
결국 친구에게 뭐라고 답했나
끝내 나는 매달린 남자의 뜻을 설명하지 않았다.
한마디만 물었다. 카드 속 그 사람, 힘들어 보여?
친구가 말했다. 이상하지, 사실 꽤 평온해 보여.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주변 빛은 오히려 밝아.
나는 말했다. 그럼 이미 정해진 거 아니야? 누군가 동의해주길 기다리는 것뿐이고.
한참 뒤에, 한 글자가 돌아왔다. 응.
그 카드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는 안다. 같은 카드를 세 번 뽑았을 때, 그녀는 이미 같은 답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하고 있었다는 것. 카드는 그저 거울이다.
동전 세 닢도 그렇다. 육십사 괘도 그렇다.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 일이 아니다. 마음이 가장 시끄러울 때, 작은 고요 한 조각을 건네주는 것이 일이다. 그 고요 속에서, 드디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들리도록.
그만둔 다음이 잘될지는? 주역에서는 어떤 괘의 다음 괘도 좋은 괘가 될 수 있다. 어떻게 걸어가느냐에 달렸다.
동전은 조용히 떨어지고, 책장은 펼쳐진다. 그 앞의 길은, 여전히 당신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밖에 없다.
세 가지 질문을 여기에 남겨둔다.
- '답은 이미 마음속에 있었는데, 인정하기가 두려웠던' 순간이 당신에게도 있었나?
- 카드 한 장, 괘 하나, 자기 자신의 첫 직관. 가장 믿는 것은 무엇인가?
- 만약 '나쁜 괘'가 나왔다면, 그것은 당신을 비추는 것일까, 아니면 당신에게 알려주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