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이야기

조주의 구자: 하나의 물음, 천 년의 침묵

어느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무. 그 한 글자를 천 년 동안 무수한 사람이 꿰뚫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답이 아니라 벽이다 — 부딪혀서, 준비했던 답이 전부 쓸모없어지는 벽.

一一如是
··9분
#조주#구자##무문관#선 공안#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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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의 구자: 하나의 물음, 천 년의 침묵

조주의 구자: 하나의 물음, 천 년의 침묵

이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유명해서 망설여졌다 — 선에 대해 쓰는 사람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다루고, 모두가 '무(無)' 자에 대해,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하지만 오늘 또 이 공안을 펼쳐보고, 그래도 몇 마디 하고 싶었다.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속에 좀 더 두고 싶었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구자환불성야무?"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무."

그 한 글자.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이상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을 가르치지 않는가. 개에게도 당연히 불성이 있다. 조주는 깨달은 선사인데, 이럴 리가 없다. 그런데 왜 '무'라고 했을까?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의 가능성에 닿았다. 그는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한 게 아니라, 질문한 그 사람에게 대답한 것이다.

질문하러 온 사람은, 아마 '확인'을 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명확한 답이 필요했다. 집에 가져가서 책꽂이에 올려둘 수 있는 답. '있다' 아니면 '없다', 하나만 주세요.

하지만 조주가 준 것은 답이 아니었다. 벽이었다.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무"라고 대답한다. 이 벽이 앞에 서 있다. 부딪혀 보면, '있다'라는 글자도 버티지 못하고, '없다'라는 글자도 버티지 못한다.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 그 잡을 수 없는 감각 — 그것이 아마, 그가 당신에게 닿게 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어떤 때, 절에서 차를 마시면서 한 노스님께 여쭤본 적이 있다. "스님, 좌선할 때 망념이 너무 많아서 어떡해요?"

스님이 나를 한 번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누가 앉아있어?"

좀 멍해졌다. "제가 앉아있죠."

스님이 또 물으셨다. "어느 너?"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조주의 '무'와 비슷했다. 답이 없는 게 아니라, 준비했던 답이 전부 쓸모없어진 것이다. 손에 든 패가 전부 죽었다.

그건 일종의 비어있음이었다. 허무의 비어있음이 아니라 — 뭐라고 해야 할까 — 갑자기 자기가 누군지 모르게 되는 그런 비어있음. 무섭지도 않고, 흥분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멈춰버린 것.

멈춰버린 그 순간, 머릿속이 일 초 멈추었다. 이야기도 없고, 판단도 없고, '내가 앉아있다'는 서사도 없다. 숨만 있고,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만 있을 뿐.

그러다 다시 생각이 돌아온다. "스님 대단하시다." "대답을 못 했다." "다음엔 이렇게 말해야지……"

생각이 돌아오면, 그 비어있음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왔었다는 건 알고 있다.


조주가 말한 '무' 자는, 후에 무문혜개 선사가 『무문관』 제1칙으로 수록했다. 무문선사가 직접 평어를 썼다. 대의는 이렇다 — '무'를 '유무'의 '무'로 이해하지 마라. '허무'의 '무'로 이해하지도 마라. 그것은 지식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논리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무문선사가 말했다. 쇠 빗자루라고 생각하라고. 모든 생각을 쓸어내라. 안도 비워지고 밖도 비워지고, '비어있음'마저 비워지면, 그때 '무' 자가 갑자기 살아 움직인다.

게송 하나를 주었다.

구자불성, 전제정령. 재섭유무, 상신실명.

'유무'에 발을 들이민 순간, 목숨을 잃는다 — 있다 없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이미 진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손에는 마신 반 컵의 식은 차가 있었다. 창밖에서 누가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작은 개가 흥분해서 땅 냄새를 맡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그 개는 '불성'이 뭔지 알까? 당연히 모른다. 하지만 땅을 맡는 그 순간, 전심전의(全心全意)다. 두 번째 생각이 없다. '내가 잘 맡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이 냄새가 무슨 의미인가'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맡고 있을 뿐.

우리는 어떤가. 무엇을 하든 '이게 맞나' '이게 좋은가' '의미가 있나'를 생각한다. 너무 많이 생각해서,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잊어버린다.

조주가 '무'라고 한 것 — '생각하지 마'라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하지 마'라는 세 글자도, 또 하나의 생각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른다.

그게 솔직한 대답이다. 나는 '무'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 '무'를 화두로 삼아 참구해 본 적도 있다 — 이 한 글자에 집중하고,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게 했다. 며칠 해봤는데, 특별한 건 없었다. 오히려 어느 날 걷다가, 실수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발가락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 그 순간, 머릿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무' 자가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통증만.

그러고는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프다." "재수 없다." "길 한가운데 돌을 왜 놔둬." — 생각이 돌아온다.

조주의 '무'는 그 돌부리였을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기 위한 것. 걸려 넘어지면, 정성스레 쌓아올린 틀이 산산조각 난다. 부서진 순간에 보이는 것은 '공'도 아니고 '불성'도 아니다 — 아, 나는 줄곧 틀을 쌓고 있었구나, 그것뿐이다.

나는 줄곧 모든 것에 의미를 찾고, 모든 경험에 라벨을 붙이고, 모든 관계를 위치시키고, 매일의 삶에 노선을 그리고 있었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 이것 자체가 하나의 라벨이다. 살아있는 존재를 개념 안에 밀어 넣으려는 행위다.

조주가 '무'라고 한 것 — '밀어 넣지 마'라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생각한다. 수행에서 가장 어려운 건 좌선도 아니고, 독경도 아니고, 지계도 아니다. 가장 어려운 건 — 자신을 용서하는 것.

모든 것에 답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 모른다고 괜찮다고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 어떤 질문에 대해, 영원히 결론 없는 사람으로 남아도 된다고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

"구자환불성야무?"

"무."

이 '무'는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며,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하나의 문이다. 하지만 밀어 열려 하지 마라 — 미는 행위 자체가 장애이니까.

문 앞에 서 있으면 된다. 밀지도 당기지도 말고, 문이 무슨 재질인지 분석하지도 말고, 역사적 연원을 연구하지도 말고.

그냥 거기 서 있으면 된다.

그러면 어느 날, 바람이 스스로 불어 열어줄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그 순간 —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그 순간 — 그것이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고, 창밖의 개는 이미 멀리 가버렸다. 차도 다 식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한 번 본다 — 『무문관』 첫 페이지. 자꾸 넘기느라 모서리가 말려있다.

책을 닫는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


당신에게 세 가지 질문:

  1. 모든 설명이 바닥나서, 침묵만 남은 순간이 있었는가? 그 침묵 속에, 무엇이 있었나?
  2. 누군가 가장 단순한 질문 — 예를 들어 "당신은 누구인가?" — 을 던진다면, 생각 없이 대답할 수 있는가? 한 번 해보라.
  3. 오늘, '답을 찾겠다는' 충동을 내려놓고, 그냥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일이 하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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