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마다 절하는 사람
《법화경》에 신통력도 변재도 없는 비구가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절하며 "나는 그대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욕을 먹고 맞아도 계속 외쳤다. 이 이야기가 나를 오래 멈추게 한 것은 —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절하는 사람
오늘 《법화경》을 넘겨보다가 '상불경보살품'에 이르러 한참 멈추었다.
이야기가 심오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 단순해서 약간 부끄러워지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아주 오래전, 한 비구가 있었다. 그에게 신통력도 없었고, 변변한 변재도 없었으며, 내세울 만한 수행의 경지도 없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냥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의 습관이 있었다 — 만나는 사람마다 절을 했다.
출가한 사람이든, 재가신자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누구를 만나든 공손하게 합장하고, 늘 같은 말을 했다.
"나는 그대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가 될 것입니다."
그것뿐이었다. 누구에게나 했다. 날이면 날마다, 해가 갈수록.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이 사람은 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라.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절하면서 "당신은 부처가 될 것입니다"라고 계속 말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과연, 이야기 속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조롱하고, 어떤 이는 욕하고,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를 '상불경' — '항상 사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자'라고 불렀지만, 그 말투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욕을 먹었을 때, 그는 멀리 서서 여전히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대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맞았을 때, 그는 달아났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 이르러서도 계속 외쳤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가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책을 덮은 채 오래 앉아 생각했다.
나는 평범한 재가 불자다. 출근하고, 장보고, 걱정도 한다. 수행이라는 건 나에게 무언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내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알아차리면 알아차릴수록 깨닫는 것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나 자신도 모른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전화를 하면, "매너가 없네"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동료가 기본적인 실수를 하면, 입으로는 "괜찮아"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것도 몰라?"라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을 보다가 나와 다른 의견을 발견하면, 먼저 이해하려 하기보다 "수준이 낮네"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생각은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서 잡을 틈이 없다. 하지만 서서히 깨달았다. 이 작고 순간적인 경멸들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든다. 벽은 얇아서 거의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있다.
상불경보살이 한 일은 사실 아주 단순했다 —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 습관을 부수려 한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절하기.
외모나 신분이나 능력에 절한 것이 아니다. 그가 절한 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 각 사람 안에 있는 '불성'이었다.
불성이라는 말은 크게 들린다. 하지만 나의 이해는 단순하다. 어떤 사람이든, 지금 어떤 모습이든,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 진지하게 대해줄 가치가 있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말로 하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하기는? 정말 어렵다.
시도해 본 적이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절하기 — 그건 역시 못 하겠고, 너무 이상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이 사람에게도 이 사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하는 사람은 방금 중요한 전화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애타게 기다리는 전화였을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실수를 한 동료는 어젯밤 잠을 못 잤을지도 모른다. 집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경험과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바깥의 무엇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정말 조금.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화가 덜 난다. 화가 덜 나면,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관계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정말 사소한 일이다. 상불경보살은 평생을 바쳐 이 한 가지만 했다.
이야기의 후반부는 어떤 의미에서 해피엔딩이다.
계속해서 이렇게 한 덕분에, 상불경보살은 아주 높은 수행의 경지에 이르렀고, 수명도 아주 길어졌으며,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그를 조롱하고, 때리고, 욕하던 사람들도 훗날 그의 제자가 되어 각자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요점은 결말이 아닌 것 같다.
요점은 그가 욕을 먹고, 맞고, 조롱당하는 동안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다. 존경할 가치가 없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럴 필요가 뭐 있지? 고마워하지도 않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했다.
멀리 서서 외치고. 도망쳐서도 계속 외치고.
가끔 생각한다. 수행이란 대체 무엇일까.
방석 위에 앉아 호흡을 관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경전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절에 얼마나 많이 가고 부처에게 얼마나 많이 절했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이것일지도 모른다 — 누군가 나를 모욕했을 때, 내 마음이 여전히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볼 수 있는가.
정말 어렵다. 정말로.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시도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상불경보살은 사실 석가모니불의 전생이었다. 달리 말해, 부처가 되기 전에도 이런 약간 바보 같아 보이는 일을 했던 것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부처가 된다는 건 어딘가에 앉아서 갑자기 대오각성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고, 좀 어리석어 보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
고마워하지 않아도.
조롱해도.
나 자신도 의미가 있는지 의심해도.
오늘 염주를 돌리다가 '상불경' 세 글자에 손이 닿았을 때, 몇 번 더 돌렸다.
무슨 특별한 수행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생각했다. 오늘 누구를 업신여겼나? 오늘 마음속에서 누구에게 딱지를 붙였나? 오늘 단 한 순간이라도 내 앞의 그 사람을 진지하게 대해줬나?
답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 다시 시도할 수 있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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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누군가를 업신여긴 순간이 있었나? 그 생각은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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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불경보살처럼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의 일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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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받거나 조롱당했을 때, 당신의 마음은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나?


